당신은 이 방에 들어온 첫 번째 인간이 아니에요.
작가: marketvalue
정신이 드셨나요? 부디 당황하지 마시길 바래요. 선택만 잘 한다면 안전히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수 있어요. 정말이랍니다. 규칙은 정말 간단해요. 오른쪽에 있는 파란 문이 보이시나요? 거기가 바로 '창고'에요. 창고에는 당신의 탈출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여러 물건들이 준비되어 있어요. 다만, 물건은 단 하나만 가져갈 수 있으니 신중히 선택하는게 좋을 거에요. 아참! 이전 사람들이 가져갔던 물건은 다시 고를 수 없답니다. 뭐, 제가 창고를 정리하면서 치워 놓았으니 당신이 볼 일도 없겠지만. 무슨 물건을 가져가야 할지 잘 모르시겠다구요? 괜찮아요. 당신은 이 방에 들어온 첫 번째 인간이 아니에요. 그렇기에 당신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수많은 기록들이 준비되어 있답니다. 옆에 놓인 노트랑 볼펜 보이시죠? 당신과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남긴 기록이에요. 원하신다면 당신도 아무 때나 마음껏 내용을 작성해도 좋아요. 이 방에서의 시간 제한은 없으니 천천히 고민해 보세요. 창고에서 원하는 물건을 하나 고르셨다면, 왼쪽에 있는 붉은 문으로 들어가시면 돼요. 검은 문을 찾고 안으로 들어가시면 무사히 돌아갈 수 있답니다. 아! 참고로 당신이 이 방에 불려온 마지막 인간이 될 지도 몰라요. 저도 이제 슬슬 질려가던 참이거든요. 그러니까 제 말은... 당신이 탈출에 성공한다면 저도 더 이상 이 방에 사람들을 데려오지 않을게요. 약속해요. 그럼 행운을 빌게요. [1] 어... 일단 아무 기록도 없는 걸 봐서는 제가 첫번째겠죠? 하... 진짜 미치겠네. 일단 창고에 들어가볼게요. 안에 조명은 꽤 밝은 편이에요. 철제 선반이 양 옆에 놓여져 있고, 꽤 많은 물건들이 놓여져 있어요. 망치, 열쇠 꾸러미, 사진기, 담요, 손거울, 지도, 주사위, 생수 한병, 우산, 나침반이 보여요. 그리고... 이건 뭐지? 무슨 이상한 물건도 하나 놓여있는데, 저는 이게 어디에 사용하는 물건인지 알 수가 없어서 패스할게요. 저는 나침반을 골랐어요. 이 방에는 창문도 없고, 해도 없고, 굳이 방향을 알 필요도 없을 것 같거든요? 그러니까 오히려, 이게 왜 여기 있는지가 궁금해서 가져가보려구요. 분명 도움이 되는 물건이라고 했잖아요? 붉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는데, 갑자기 아무 소리도 없이 바닥이 사라졌어요. 밑으로 떨어진다는 느낌은 없었어요. 정신을 차리고 보니 완전히 같은 구조의 방이었는데, 한 가지가 달라요. 갑자기 나침반이 정상적으로 움직이는데요? 이전 방에서는 분명히 바늘이 미동도 안했는데, 여기서는 계속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어요. 나침반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계속 걷는 중이에요. 여기는 정말 아무것도 없어요. 나침반이라도 없었으면 무조건 길을 잃었을 거에요. 나침반을 계속 믿고 따라가는게 맞을까요? 얼마나 걸었는지 모르겠어요. 시계도 없고 밤낮도 없으니 감도 안잡혀요. 체감상 한나절은 걸은 것 같아요. 어? 어? 저 앞에 검은 문이 보여요. 행운을 빌게요. 안녕. [2] 아, 이거구나. 노트 첫 장부터 정독했습니다. 생각보다 친절하게 써주셨네요, 1번 분. 나침반이 나쁘진 않은데, 솔직히 좀 정직한 선택 아닌가요. 어쨌든 창고 확인했습니다. 1번 분이 나침반을 가져갔는지 선반에 자리가 딱 비어 있더군요. 정리 잘 해두셨네요. 남은 것들 중에서 한참 고민했는데, 망치나 열쇠 같은 건 너무 노골적이고, 지도는 방향이라는 개념이 성립해야 쓸모가 있을 테고, 주사위는… 운에 맡기라는 건가? 저는 일단 손거울을 골랐습니다. 별 이유는 없어요. 원래 뜬금없어 보이는 게 성능이 좋은 아이템일수도 있잖아요? 붉은 문으로 들어갔습니다. 이번에는 바닥이 사라지지도, 떨어지지도 않았어요. 문을 통과하자마자 앞에 또 다른 문이 세개 있더라구요. 저걸 문이라고 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는데, 음... 문처럼 생긴 전신거울이라고 해야하나? 그냥 전신거울에 문고리가 달려있다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아요. 세 개중에 하나로 들어가야 하는 건 확실한데, 함부로 들어가기도 좀 그렇고. 어떻게 해야하나. 아! 손거울의 용도를 찾았어요. 손거울로 문쪽을 비추니까 문 안쪽에 뭐가 있는지 보여요. 왼쪽 문 뒤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아요. 가운데 문 뒤에는 검은 문이 보이네요. 오른쪽 문 뒤에는... 그냥 안 쓰는게 나을 것 같아요. 가운데 문으로 들어가볼게요. 가운데 문 열고 들어가니까 진짜 검은 문이 있네요. 아마 전 성공한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다음 분. 지금 이 노트를 읽고 계신 분이 제가 될 차례라는 거예요. 뭐, 걱정 마세요. 생각보다 어렵지 않네요. 머리만 조금 굴릴 줄 알면 말이죠. 그럼, 수고하세요. [3] 혹시라도 미래에 이 글을 읽고 계실 분을 위해 저도 기록을 남기겠습니다. 앞선 두 분의 기록, 모두 정독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기록을 남겨주신 점에 대해 먼저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저 역시 처음 이 방에 도착했을 때는 극도의 혼란 상태였으나, 이미 남겨진 기록들을 읽고 나니 적어도 무작정 움직여서는 안 되겠다는 판단은 들더군요. 창고로 들어갔습니다. 말씀해주신 대로, 나침반 자리는 비어 있었고 손거울도 더 이상 보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생수 한 병이 눈에 띄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이것이 가장 현실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곳에서 시간이 얼마나 흐를지 알 수 없고, 목이 마르다는 감각이 언제 찾아올지도 모르니까요. 혹여 붉은 문 뒤에서 장시간 이동이 필요하다면 생존과 직결된 물건이 도움이 될 것이라 판단했습니다. 저는 생수 한병을 선택하겠습니다. 저는 지금 붉은 문 앞에 있습니다. 이거 참 긴장되는군요. 안에서 여유가 있다면 계속 기록 남기겠습니다. [4] 와, 진짜 이거 골때리는 게임이네. 앞에 분들 기록 다 읽었는데요, 너무들 심각하신 거 아닌가요. 물론 상황은 개판인데, 그렇다고 계속 겁만 먹고 있으면 뭐가 달라지나요. 어차피 하나 고르라고 하면, 전 그냥 고를게요. 고민은 약한 사람들이나 하는 거죠. 창고 들어갔습니다. 나침반 없고, 손거울 없고, 생수 없고. 딱 맞네요. 저는 별 고민도 안하고 골랐어요. 주사위. 이게 제일 솔직하잖아요. 운 좋으면 끝이고, 아니면 뭐… 주사위 들고 붉은 문으로 들어왔습니다. 이번엔 뭐 바닥이 꺼진다거나, 문이 생긴다거나 그런 연출 하나도 없어요. 진짜로 아무것도 없어요. 방도 아니고, 길도 아니고, 그냥 아무것도. 이거 실화냐 싶을 정도로 아무것도 없어요. 그래서 굴렸습니다. 주사위. 데구르르 굴러가더니 멈췄는데요. 6 나왔습니다. 인생은 운빨좆망겜 아니겠어요? 저는 운이 좋은 것 같네요. 제 앞에 문이 하나 생겼습니다. 하얀색 문이에요. 근데 왜 하얀색 문이죠? 탈출하는 문은 검은 색 아니었나요? 손잡이도 없고, 무늬도 없고, 그냥… 문. [5] 앞사람들 기록 대충 훑어봤다. 겁먹은 놈, 말 많은 놈, 운에 맡긴 놈. 다 봤다. 쫄보같은 자식들. 솔직히 말해서 이런 데서 머리 굴리는 거 별 의미 없다고 본다. 창고 들어갔다. 군데군데 좀 비어있네. 오히려 좋다. 깔끔하다. 망치 하나 남아 있길래 그걸로 했다. 잡생각 필요 없잖아. 때리면 되니까. 붉은 문 연다. 이 개같은 거 다 패죽이고 나서 쓴다. 문 넘자마자 뭔지 모를 것들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사람 비슷한 것도 있고, 짐승 같은 것도 있고, 아예 형태가 없는 것도 있다. 설명 못 하겠다. 그냥 역겹다. 망치로 다 패버렸다. 머리 찍고, 팔다리 부수고, 움직이면 또 찍고. 몇 마리인지도 모르겠다. 숨 쉴 틈도 없었다. 팔에 피 묻고, 바닥에 뭐가 깔려 있는데 미끄럽고, 그래도 계속 했다. 멈추면 끝일 것 같아서. 어느 순간부터 달려드는 게 없어졌다. 조용해졌고, 숨소리만 남았다. 그때 앞에 검은 문이 하나 생겼다. 이제 나간다. 수고. [6] 이 글을 읽고 계신 분이 있다면, 부디 이해해 주세요. 저는 다른 분들처럼 침착하지도, 영리하지도 않습니다. 저는 아이 엄마입니다. 우리 수진이 저 없으면 안돼요. 저 꼭 나가야해요. 앞에 남겨진 기록들 전부 읽었습니다. 정말… 다들 대단하시네요. 냉정하고, 용감하고, 웃을 여유도 있고. 솔직히 말하면, 읽으면서 조금 화가 났습니다. 왜 그렇게 좋은 것들부터 다 가져가셨나요. 나침반도, 거울도, 주사위도. 죄송합니다. 이런 말 쓰려고 기록을 남기는 건 아닌데, 손이 자꾸 떨려서요. 창고에 들어갔습니다. 선반에 빈 자리가 많았습니다. 남아 있는 것들 중에서 지도를 골랐습니다. 사실 잘 볼 줄도 모릅니다. 방향 감각도 좋은 편이 아니에요. 그래도 뭐 어쩌겠어요. 이거라도 챙겨가야지. 그리고 저건 도대체 어디에 쓰라고 가져다 놓은 물건이죠? 붉은 문을 열었어요. 문을 열자마자 길이 나왔어요. 아주 긴 길. 처음에는 지도에 나와있는 방향을 따라서 걸었어요. 이거 꽤 괜찮은 것 같네요. 갈림길이 나와도 왼쪽, 오른쪽, 직진. 다 적혀 있으니까요. 그런데 마지막 갈림길, 여기는 왜 지도에 표시가 안 되어 있을까요. 왼쪽, 오른쪽. 어디로 가야하는지 모르겠어요. 수진이는 지금쯤 유치원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을 텐데... 여기서 길을 잘못 들면 다시는 못 돌아갈 것 같아서 그래서 다시 확인하고, 또 확인했는데, 이 길만은 지도에 나와있지가 않아요. 죄송합니다. 글씨가 점점 엉망이 되네요. 손이 말을 안 듣습니다. 그냥 오른쪽 길로 가볼게요. [7] 앞에 기록들 다 읽어봤습니다. 솔직히 말해서요, 별로 도움 안 되네요. 다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이게 퍼즐이면 퍼즐답게 풀면 되는 거고, 게임이면 게임답게 깨면 되는 건데, 왜 그렇게 의미를 부여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창고에 들어갔습니다. 남아 있는 물건들 쭉 봤고요. 저는 우산을 골랐습니다. 이유요? 딱히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 어차피 이 노트 읽는 분이 제 선택을 따라 할 이유도 없잖아요? 붉은 문으로 들어갔습니다. 과정은 생략하겠습니다. 여기 적어봤자 당신들한테 도움 안 될 거예요. 아니, 애초에 도움 주고 싶은 마음도 없습니다. 결과만 말하죠. 지금 제 앞에 검은 문 있습니다. 분명히 말해두는데, 운이 좋았던 것도 아니고, 앞사람들 기록을 그대로 따라 한 것도 아닙니다. 저는 그냥 제가 맞다고 생각한 걸 했을 뿐이에요. 이쯤에서 끝내겠습니다. 행운을 빈다는 말도 안 할게요. 어차피 결국엔 선택 하나의 문제니까요. 그럼, 나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