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 뭐 까먹은거 없어?

작가: 반설미

큰일났다. 아니, 큰일이라는 말로도 모자라다. 오늘은 여자친구와의 3번째 기념일이다. 문제가 되는건, 내가 이 사실을 깨달은 것은 불과 1분도 채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여자친구가 내 자취방으로 오기까지 40분. 자취방 이용수칙을 어기는 한이 있더라도 어떻게든 이벤트 구색을 맞춰야만 한다. 사소한거 한두개쯤 틀린다고 죽는건 아니니까. 여기까지 생각한 나는 화장실이 딸려있는 원룸을 빙 둘러 보았다. 젠장, 시작도 하기전에 난관이 시작되었다. 이런 난장판에서는 뭘 준비하든 최악의 분위기가 될 것이 뻔하지. 청소를 마지막으로 한게 언제인지 생각도 나지 않는다. 바닥을 뒹구는 잡동사니들을 주섬주섬 주워모은 나는 베란다에 우르르 쏟아부었다. 아 참. 이용수칙에 큰소리 내지 말랬었는데. 이정도는 괜찮겠지. 거실로 돌아와 다시 방을 돌아보니 베란다에 한데 모여 산을 이룬 잡동사니들이 통유리창 너머로 훤히 보인다. 이래서야 청소가 되었다고 할 수도 없겠는데. 나는 언젠가 사두었던 커튼을 찾아 베란다를 가렸다. 좋아. 훨씬 나은 것 같다. 이제 나름 말끔해진 거실에 적당히 분위기를 잡아줄 장식들을 달면... 여전히 더러운 바닥 때문에 전혀 분위기가 잡히지 않는다. 왜지? 아까 정리도 했었는데. 아하. 의외로 원인은 가까이 있었다. 베란다의 잡동사니들을 처리하고 나니 바닥을 가리던 물건들이 사라져 먼지와 얼룩으로 뒤덮인 방 바닥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버렸던 것이다. ...바닥에 난 하얀 털들은 잡초라고 생각하는 편이 정신건강에 좋을 것 같다. 그렇게까지 더럽게 살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는데, 오늘부로 생각을 바꿀 필요가 있어보인다. 걸레는 집에 없으니 물티슈로 최대한 수습해봐야겠다. 먼지와 얼룩으로 뒤엉킨 바닥을 최대한 박박 닦아보자니 딱딱하게 굳은 얼룩이 잘 지워지지 않아 애를 먹었다. 여름이라 바닥에 있던 이물질이 녹아 눌러붙은 흔적도 종종 눈에 들어온다. 으… 생긴 것처럼 끔찍하게 안지워지네. 이건 도대체 뭐하다가 생긴 얼룩이지? 꽤 오래 전에 생긴 모양인지 바닥 구석구석 스며들어 도구까지 써가며 지워야 했다. 락스를 쓰면 더 잘 지워지겠지만 지금 대청소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럴 시간도 없다. 애초에 락스냄새 나는 방에서 기념일을 보낼 커플이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좋아, 이런 저런 잡생각과 함께 넓다고는 못할 방바닥을 전부 닦아내니 다행히도 이번에는 바닥까지 꽤 말끔해졌다. 이제 공간은 어느정도 준비 되었으니 다른 아이템이 필요하다. 아이템이라면 역시 반지가 좋을까? 아니. 그럴 돈도 없고 시간이 늦었다. 더군다나 지금 내 통장 잔고로 살 수 있는 반지는 저 건너편 문방구의 플라스틱 큐빅 반지 뿐이다. 그렇다면 남은 선택지는 하나로 좁혀진다. 그래, 음식! 특별한 날을 위한 음식이 필요하다. 이왕이면 정성을 가득 담아 직접 만든걸로. 지금 집에 있는 재료를 생각해보면... 아 그래, 다행히도 냉장고에 고기가 있다! 그걸로 스테이크를 만들면 꽤 그럴듯한 상황이 연출될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다다른 나는 냉장고로 달려가 수두룩하게 쌓여있는 검은 비닐봉지나 집어 속에 싸여있던 고깃덩이를 꺼내어 손질하기 시작했다. 뼈와 힘줄, 그 외에도 이것저것. 고기를 해제하고 소스에 절이다 보니 거실을 정리한 보람도 없이 주방이 또 엉망이 되었다. 도마 위에서 지글거리는 프라이팬으로 고기를 옮겨주고 나니 달짝지근한 소스 향과 함께 고소한 고기 냄새가 올라온다. 그놈의 이용수칙 때문에 내몫이 없다는게 한이라면 한이다. 고기요리를 하게된다면 절대 잔반을 남기면 안된다니. 아예 하지 마라는 것도 아니라 참 왜있는지 모를 수칙이다. 고기가 익어가며 잠시간의 여유가 생기니 내 시선은 절로 피투성이가된 도마로 향했다. 이것도 빨리 치워야겠다. 피묻은 칼과 도마는 커플 사이의 이벤트에 전혀 도움되지 않으니까. 싱크대에 조리도구를 집어넣은 나는 차가운 물에 얼어가는 손을 외면하며 시계를 바라보았다. 여자친구가 오기까지 10분. 청소에 시간을 너무 쓴 탓인가, 생각보다 시간이 더 촉박해져 마음이 더 급해진다. 꼭 이렇게 상황이 급해지면 사람은 실수를 하기 마련이라 왠지 불안해진다. 쾅! 역시 불안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 뭘 떨어뜨린거지? 소리의 근원지를 파악하기 위해 고개를 숙인 나는 여전히 말끔한 바닥에 당황하고 말았다. 물건이 떨어진게 아니라면...? 쾅쾅! 이어지는 소리에 문쪽으로 돌아가는 고개. 여자친구인가? 아니, 아직 시간은 꽤 멀었다. 그렇다면 저 정체불명의 방문자는 하나 뿐이다. 그 망할 아저씨. 이따금씩 와서 어떻게 알았는지 내 지인들에 대해 물어보는데, 정말로 끈질겨서 결국 지인들에 대한 정보를 하나 둘 듣고서야 자리를 떠난다. 이상한 점은 이거다. 저 아저씨가 물어본 지인들은 연락이 되지 않는다는 것. 이용수칙은 내가 실종된 사람들과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절대로 알려선 안된다고 했던 것 같은데... 다행히 아직까지는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다. 한동안 안오더니 이런 급한 날에 갑자기 방문을 한다고? 오늘은 괘씸해서라도 아무말 못해주겠다. 나는 집에 아무도 없는 척 조용히 현관문 앞의 소음을 무시했다. 매번 꼬박꼬박 나가서 다 답해줬었는데 이번 한 번 쯤은 봐줄만 하지 않은가. 시간차를 두고 다시 들려오는 노크소리. 이어지는 정적 속에서 부글거리는 육즙소리가 들려온다. 언제쯤 가려나? 여자친구가 오기 전에 갔으면 좋겠는데. 내 생각을 듣기라도 한걸까, 마침 밖에서 돌아가는 발걸음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통하다니. 다음에도 바쁘면 이 수법을 써먹어야겠다. 또 하나의 깨달음을 얻은 나는 계속해서 완성된 스테이크를 접시에 옮기고는 주방을 정리했다. 좋았어, 이제 여자친구를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나는 스테이크를 올려둔 식탁에 앉아 조용히 그녀가 오기를 기다렸다. 막상 준비를 끝내니 기대감으로 들떠버린 마음을 누르며 시계를 바라보니 그녀가 오기까지 남은 시간은 2분. 아슬아슬하지만 다행히 완성했다. 꽤 그럴듯해진 방 안을 둘러보며 작은 성취감을 느끼자니 갑작스런 휴식이 왠지 길게 느껴진다. 준비할 때는 눈 깜짝할새 지나가던 2분이라는 시간이 지금은 왜이렇게 천천히 흐르는지. 생각보다 넉넉하게 남은 시간에 나는 배란다의 짐더미 속에서 제사할 때나 썼을 하얀 양초를 찾아 하나 둘 불을 붙였다. 스테이크 위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을 보며 시간을 기다리자니 불안했던 시작이 무색하게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 창문을 내다 보니 붉은 색으로 구름을 물들이던 노을은 어느새 별하늘로 뒤덮혔다. ...왜? 아직 오지 않는것인가. 약속시간으로부터 벌써 몇시간이 지난 시점, 나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뭐지? 뭐가 잘못된거지? 아무 이유 없이 약속을 깰 사람은 아닌데…. 아. 문득 나는 그녀가 이미 집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스테이크를 가져다주기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벌써 시간은 한참 지나 약속시간을 훌쩍 넘긴 채였다. 우리 집에 온지 이틀이나 지났잖아? 많이 기다렸을텐데... 미안해지네. 나는 서둘러 스테이크 접시를 들고 문을 열어 그녀를 맞이했다. 문 너머의 냉기가 여자친구를 차게 식혔다. 딱 먹기 좋겠군,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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