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터 슬라이드가 끝나지 않는다.
작가: 방울한올
30초가 지났을 때, '이거 생각보다 길구나'라고 생각했다. 1분이 지났을 때, '이제 슬슬 끝날 때가 되지 않았나?'라는 의문이 들었다. 3분이 지났을 때, 단순히 나의 시간 감각을 의심했다. 5분이 지났을 때, 무언가 단단히 잘못됐음을 깨달았다. * 푹푹 찌는 여름, 살인적인 더위를 피하기 위해 친구들과 워터파크로 놀러 갔다. 우리는 대충 물만 적시고 바로 워터 슬라이드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야 당장 이 더위를 날릴 만큼의 시원함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야외의 뜨겁게 달궈진 바닥은 우리의 걸음에 불을 지폈고, 매섭게 달리니 기구까지는 금방 도착했다. 평일 오전, 한적한 워터파크의 분위기는 어릴 때의 향수를 불러일으킬 것만 같았다. 워터 슬라이드를 서로 먼저 타겠다면서 뛰어오른 시설의 계단은 물 냄새가 섞인 여름의 색이었다. 정상까지 제일 먼저 도착한 건 나였고, 나는 직원의 안내를 받아 가장 먼저 워터 슬라이드의 구멍 속으로 뛰어들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분명 그랬다. 그런데 왜. 왜 이거 안 끝나는거냐? * 시원한 물결과 함께 빠른 속도로 밑으로 내려가는 감각은 재미있다. 원통 속의 어두움을 위안해주는 여러 색상의 LED 조명도 보기 좋았다. 딱 5분까지만. 이런 종류의 즐거움은 5분을 넘어가서는 안 되는 즐거움이다. 사실 5분도 길지만, 앞의 어둠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무언가 단단히 잘못됐다. 애초에 이런 속도로 5분 동안 내려갈 만큼 높은 곳이 절대 아니었다고. 문득 갑자기 이 상황이 무서워졌다. '이대로 안 끝나면 어떡하지?'라는 생각과 함께, 양손을 기구와 마찰시켜 속도를 줄였다. 중간에 멈추면 다음 사람과 부딪혀 위험하다는 것은 알지만, 혼자서 이걸 계속 타고 내려가느니, 차라리 사람과 부딪히는 고통이 더 낫다는 판단이다. 물이 계속 밑으로 흘러서 멈추는 것도 고역이었다. 살짝 튀어나온 천장 쪽의 LED에 손가락을 걸친다는 수준으로 멈췄던 것이다. 너무 급하게 멈추느라, 손바닥이 벽면에 쓸려서 쓰라렸다. 그럼에도 손을 벽에서 놓을 수는 없었다. 놓는 순간, 다시 밑으로 내려가기 시작할 것이다. 이도저도 못하는 상황에서, 워터 슬라이드 중간에 멈춘 채로 나는 하염없이 다음 사람이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내 바로 뒷사람이 누구였지? 아, 그래. 다음은 형석이였다. 짜식, 나한테 져서 분해하는 얼굴이 보기 좋던데. ... "형석아! 내 말 들려?" 빨리 내려와줘 형석아 "들리면 대답해!!" 나 버티기 힘들어 "형석아!!" 부탁할게 ... "저기요!! 아무도 없어요??" "살려주세요! 저 여기에 갇혔어요!!" "제발..! 아무나 대답, 케흑 켁..." "..대답 좀 해주세요..!" ... * 또다시 5분쯤 지났을까. 아무도 내려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아무도 날 도와주러 오지 않는다는 것을 체감하기엔 비참한 시간이었다. 내 외침은 메아리를 치다가 흩어질 뿐이었고, 그 어떤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도대체 왜.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난거야.. 내 앞뒤는 훤히 뚫려있었지만, 난 이곳에 뻑뻑하게 갇힌 것이 분명했다. * 슬슬 추워졌다. 끊임없이 내려오는 물줄기 탓에 내 하반신은 싸늘해졌다. 여기서 죽치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움직여야 한다. 나가야 한다.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불사의 존재라 생각한다는 말이 있다. 이제야 알겠다. 그 말은 개소리다. 이곳에 계속 처박혀 있으면 죽는다. 무조건 죽는다. 그나마 힘이 남아있는 지금이라도 움직여야 한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나는 내려왔던 곳을 다시 오르기로 마음먹었다. 미끄러지지 않으면서 몸을 반대 방향으로 돌리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몸을 돌리면서 어쩔 수 없이 조금 더 밑으로 내려갔지만, 위쪽을 바라본 상태로 몸을 중간에 고정시키는 것까지는 성공했다. 그렇게 나는 좁은 원통형 구조물 내부에서 발을 내딛기 시작했다. 미끄러운 물줄기를 맞아가며 굴곡진 경사면을 오르는 것은 쉽지 않았다. 마땅히 잡을 것도 없었기에 그저 손과 발을 최대한 밀착시켜 밀어 올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손바닥은 열을 받아 쓰라렸고, 다리는 차가워져 후들거렸다. 한번 미끄러지는 순간 끝이었다. 발 한 번이라도 삐끗하면,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발생한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난 앞으로 나아갔다. 반드시 나가고 말겠다는 집념 하나로, 오기로 밀어붙이면서 조금씩,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계속 이 속도로 간다면 적어도 4시간 안에는 정상에 도착할 것이다. 딱 4시간만 버티자. 나간다. 난 나갈 것이다. ... 살고싶다. * 오르면서 그다지 많은 일은 없었다. 무슨 일이라도 벌어지길 바랐지만, 아무도 없었다. 배가 고파지면 고개를 숙여서 흐르는 물을 마셨다. 박혀있는 LED를 세면서 올랐지만 5,000개가 넘었을 때 세는 걸 멈췄다. 손바닥을 볼 수는 없었지만 커다란 물집이 잡힌 것이 느껴졌다. 피곤하다. 눈꺼풀이 감겨온다. ... 4시간은 족히 넘을 정도의 시간이 흘렀음은 확실했다. 시계도 없고 하늘도 볼 수 없었지만, 적어도 그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 허망하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어졌다. 더 오른다고 끝이 있긴 한 걸까. 손발이 너무 아프다. 계속 굽혀온 허리도 끊어질 것만 같다. 배고프다. 다리가 저리다. 생리적인 졸음이 밀려온다. 미칠 것 같다. ... 그냥 잘까. 눈을 감고 이 물결에 몸을 맡기면 편하겠지. 굳이 스스로 고통 속에 뛰어들어야만 하는 것일까. 그래. 어쩌면 그때 조금만 더 내려갔으면 끝이었을지도 몰라. 잠깐만 눈을 붙였다가 다시 뜨면, 화창한 바깥에서 깨어날지도 모른다. ㅡ 하지만.. 어쩌면 조금만 더 올라가면 끝이 나오는 것은 아닐까. 여기서 포기하는 게 맞는 판단일까.. ㅡ 시발.. 어떡해야되지? 머리가 너무 아프다. 왜 나였던거야 왜 내가 제일 빨리 올라왔지 분명 우리들 놀러온거였잖아 "제발.. 이 좆같은 악몽에서 벗어나게 해줘.." "진짜 아무도 없는 거야..? 아무라도 좋으니깐, 제발 대답을.." ... [으히히힉 카학 꺽걱꺽] [카하학 깍깍 티시싯] 대답이 돌아왔다..? 등 뒤에서, 밑의 방향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물소리에 갇혀있던 귀를 쫑긋 세우게 할 정도로 날카로운 소리였다. 결코 환청은 아니었다. 소리를 듣자마자 고개를 돌렸지만 어두워서 밑은 잘 보이지 않았다. 웃음소리인가..? 소름돋는 소리였지만, 그게 무슨 소리였든 간에 아래쪽에 누군가 있는 것은 분명했다. 어쩌면 여기서 나가게 해줄지도 모른다. 마음 속에 희망이 싹트기 시작했다. "저기요!! 거기 누구 있어요?" [거기 누구, 저기요!! ] [으힉] "살려주세요! 여기에 갇혔어요!! 이쪽으로 와주세요!!" [여기에, 있어요? 거기 누구, 저기요!!] [카하하학] "저기요..? 혹시 그쪽도 갇힌건가요?" [이쪽으로 와주세요!! 살려주세요! ] [갇힌건가요?] 이런 시발. 저건 사람이 아니다. 이상하게 반음정 정도 높은 내 목소리가 돌아온다. 저것은 내가 뱉은 말을 따라한다. 이쪽으로 와주세요!! 이쪽으로 와주세요!! 살려주세요! 저기요..? 힉 히히힉 툭 턱 툭 턱 툭 턱 원통을 울리는 둔탁한 마찰음이 들려온다. 저새끼, 올라오고 있다. 이런 시발 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저것의 목소리도, 저기요!! 저기요!! 저기요!! [꺽꺽 살려주세요! 이쪽으로, 이쪽으로, 키히히힉 거기! ] 시발 시발 시발 시발 시발 "헉, 허억, 헉, 허억. 허억. 헉, 허억." 찰박 찰박 찰박 찰박 툭 턱 툭 턱 툭 턱 툭 턱 [저기요!! 이쪽으로, 있어요? 와주세요!!] "헉, 학, 허억. 시발, 헉, 지랄마. 허억." 찰박 찰박 찰박 찰박 툭 턱 툭 턱 툭 턱 툭 턱 [갇혔어요! 갇혔어요! 카하하학] [저기요!! 와주세요! 히힉 히히힉 학] "헉, 허학, 안돼. 학, 오지마. 헉, 하악." 찰박 찰박 찰박 찰박 툭 턱 툭 턱 툭 턱 툭 턱 [그쪽도, 와주세요! 킥 키히힉] [거기, 와주세요! 이쪽으로! 꺽걱꺽] "헉, 제발, 헉, 하악. 제발. 헉, 허억. 학," 찰박 찰박 찰박 찰ㅡ박 툭 턱 툭 턱 툭 턱 툭 [저기요!! 갇힌건가요? 갇혔어요!! ]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 [힉 하학! 하하학! ] * "야 이형석. 워터 슬라이드 어땠냐?" "생각보다 짧아서 아쉽긴 했지만.. 이 정도면 뭐, 재밌네." "아까 너 나올 때 표정 볼만하던데, 사실 개쫄았지?" "하.. 이따 애들 다 나오면 한 번 더 타실??" "...그래! 한 번 더 타자! 아직도 시간은 많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