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반대말에 관하여.

작가: 방울한올

나는 신학을 전공한 사람이 아니다. 철학도 아니고, 윤리학도 아니다. 나는 그냥 보험 설계사다. 10년째 사람들의 불행에 가격표를 붙이는 일을 하고 있다. 교통사고 후유증은 얼마, 암 진단은 얼마, 배우자 사망은 얼마. 그래서 나는 안다. 기적의 반대말이 무엇인지. * 사람들은 기적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 기적이란 확률 밖의 사건이 아니다. 기적이란 방향이다. 장님이 눈을 뜨는 것. 중풍 환자가 일어나 걷는 것.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 이 모든 기적의 공통점은 '회복'이다. 결핍에서 충만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죽음에서 삶으로. 그렇다면 그 반대 방향은? 충만에서 결핍으로. 빛에서 어둠으로. 삶에서 죽음으로. 그것은 매일 일어난다. 당연한 일상은 뉴스에도 나오지 않는다. 보험 접수 서류에는 나온다. 정말이지, 매일같이 나온다. * 내가 신을 믿게 된 건 서른여섯 살, 봄이었다. 동료 보험 설계사인 병철이 때문이었다. 병철은 나보다 두 살 적었으나, 나보다 두 배 자주 웃었고, 나보다 세 배 더 반듯했다. 그는 첫인상부터 착한 사람임이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남들보다 일찍 출근하여 아침마다 사무실 화분에 물을 줬다. 길에 쓰레기가 떨어져 있으면 당연하다는 듯이 주머니에 넣었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는데.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평소와 같던 어느 날, 병철의 딸이 뇌종양 진단을 받았다. 일곱 살이었다. * 보험 회사는 소식이 유달리 빠르다. 생판 남의 불행도 들려오는 곳이니, 당연한 일이다. 나는 그 소식을 듣고 이틀 동안 아무렇지 않았다. 직업병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루에도 세 건씩 접수한다. 하지만 사흘째 되던 날, 병원 복도에서 병철을 마주쳤을 때, 그는 보험 서류를 들고 있었다. 우리 회사 서류였다. 내가 직접 설계한 상품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알고 있었다. 그 보험에는 소아암 특약이 적용되지 않는다. 당연히, 그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10년 동안 남의 서류를 들여다보며 '이 부분이 비어있으면 이런 상황에서 큰일 납니다'라고 설명하던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자기 서류의 '그 부분'이 비어있다는 것을 모를 리는 없었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병철의 웃지 않는 모습을 보았다. 무표정과는 분명히 구분되는, 더 깊숙한 표정. 그의 표정에는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구덩이가 하나 파여있었다. 눈물이라도 흘렸으면 모를까, 그는 그냥 껌껌하게 꺼져있었다. 어스름한 골목길의 고장난 가로등처럼. 공허한 눈빛은 초점이 없다기 보다는 아무것도 없는 곳을 정확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항상 웃으며 고객과 동료를 대하던 그의 모습과는 너무나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매일 지나치는 불행 중 하나인 줄 알았다. 그 불행의 밀도를 전혀 모른 채 일처리 업무가 추가됐다고 여겼다. 그렇게만 생각했던 내가 갑자기 너무나 역겨웠다. 병철을 더 마주할 자신이 없어서 그대로 뒷걸음쳐 자리를 벗어났다. 비틀거리며 달렸다. 몇 번을 벽에 부딪히며 휘청거렸다. 올라온 구역감에 화장실로 들어가 변기에 대고 위장을 비웠다. 십 년 동안 처음으로. 그 상품에 소아암 특약 하나만 추가했으면. * 병철은 다음날 내게 연락을 했다. 치료비에 보탤 돈을 빌려달라는 연락이었다. 요새 발품을 팔아가며 돈을 꾸고 있다고 들었다. 나는 돈을 빌려줬다. 어제의 일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그냥 빌려줘야 했다. 사실 걱정되는 것은 따로 있었다. 이 삭막한 회사에 돈을 빌려줄 사람이 몇이나 될련지. 불행을 저울질하는 사람들이 가득한 이곳은 가장 수지타산을 잘 따지는 곳이다. 연민이나 동정 같은 감정보다는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수치가 앞서는, 그런 곳이다. 그에 비하면 병철은 인간적인 사람이었다. 돈을 빌려준 다음날 병철이 찾아왔다. 빌려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회사 사람들 중에서 나만 빌려줬다고 말했다. 가슴 한 켠이 아려왔다. 그는 이제 교회를 다니고 있단다. 내가 기억하는 병철은 절대 신앙심을 가질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왜 갑자기 교회를 다니게 된 것인지 물었다. 병철은 한참을 고민하더니 답했다. "딸한테 해줄 수 있는 게 기도밖에 없어서." * 그날 밤, 나는 처음으로 신에 대해 생각했다. 원망하려는 게 아니었다. 그냥, 따지고 싶었다. 논리적으로. 기적은 왜 이렇게 드문가. 병철 같은 사람의 일곱 살짜리 딸이 뇌종양을 얻는 건 왜 이렇게 흔한가. 충분히 화분에 물을 주면, 충분히 쓰레기를 주우면, 충분히 웃으면, 충분히 착하게 살면. 그 딸의 머릿속 세포들이 조금은 얌전해져야 하는 것은 아닌가. 그러던 중, 나는 한참을 따지다가 멈췄다. 불현듯 이상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 보험이라는 것을 생각해봤다. 사람들은 평안할 때 보험을 들지 않는다. 건강할 때는 보험료가 아깝다고 생각한다. 불행이 찾아온 뒤에야, 전화를 걸어온다. 선생님, 이런 상품 없어요? 이런 경우는 어떻게 돼요? 왜 미리 알려주지 않았어요? 나는 그때 항상 이런 말을 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른다. '미리 연락 주셨으면 더 좋은 설계가 가능했을 텐데요.' 그 순간, 뭔가가 내 뒤통수를 세게 쳤다. 신은 보험 설계사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신은 우리의 전화를 기다리는 설계사다. 기적은 광고다. 가끔, 아주 가끔, 장님의 눈을 뜨게 하고, 죽은 자를 살린다. '이런 것도 가능하다'는 걸 보여주는 거다. 그리고 기적의 반대말들, 그 흔하고 끔찍하고 일상적인 순방향의 사건들은. 전단지다. 지금 연락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는 샘플. 신은 우리를 괴롭히는 게 아니다. 신은 우리가 너무 평안하면 전화를 안 한다는 걸 아는 거다. 고작 영업 10년 차인 나도 안다. 고객은 행복할 때 연락하지 않는다. * 이 생각에 도달한 순간, 나는 내가 끔찍한 인간임을 직감했다. 동료의 딸이 뇌종양 판정을 받은 걸 두고 영업에 비유하다니. 그런데도 나는 이 발상을 멈출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 논리가 너무나 정확했기 때문이다. 병철은 손실보험과 사망보험은 들었지만 소아암 보험은 들지 않았다. 모든 불행을 대비할 수는 없다. 당연한 사실이다. 그래서 소아암 특약 한 줄을 지운 것이다. '내 딸이 설마'라고만 생각했겠지. 10년 동안 남의 설마를 팔아 먹고살면서 말이다. 보험 설계사인 그가 모를 리는 없었다. 동종 업계 종사자인 신도 모를 리가 없었다. * 병철은 딸이 수술대에 오른 날부터 달라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냥 야위어 갔다. 그런데 단순히 살이 빠지는 게 아니었다. 사람이 마르면 보통 광대가 도드라지고 눈이 깊어지는 법인데, 병철은 조금 달랐다. 얼굴의 굴곡이 자신을 향해 들어갔다. 이목구비가 납작해지는 것 같았다. 마치 누군가 엄지손가락으로 찰흙을 지그시 누르듯, 그의 얼굴이 안쪽으로 꺼져들어 가고 있었다. 눈 밑에 검붉은 멍 같은 것이 생겼는데, 그건 다크서클이 아니었다. 피부가 얇아져서 그 아래 혈관이 비쳐 보이는 것이었다. 병철의 몸이 투명해지고 있었다. 전해 들은 바로, 병철은 단순히 교회를 다니기 시작한 게 아니라 매달렸다. 새벽 기도를 빠지지 않았다. 금요 철야에도. 한 달쯤 지났을 때 사무실에서 그를 마주쳤다. 나는 순간 말을 잃었다. 병철의 손에는 딱지가 가득했다.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도 오래 해서 손바닥과 손가락 관절이 쓸린 자국이었다. 딱지가 앉았다가 또 쓸리고, 또 딱지가 앉은 것이 여러 겹으로 쌓여 있었다. 그의 손은 더 이상 보험 서류를 잡던 그 손이 아니었다. 나는 참지 못하고 말했다. "병철아, 너 요즘 이상해. 제발 교회 그만 가." 병철이 나를 봤다. 눈이 이상했다. 너무 말라 있었다. 눈물도 다 써버린 사람의 눈. 흰자위가 황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잠을 못 자는 게 아니라, 몸속에서 무언가가 타고 있는 사람의 색깔. 한참 서로를 바라보다가 병철은 입을 열었다. "저는 아직 기다리고 있습니다." "뭐를?" "신이 손을 잡아줄 때까지 저는 기다릴 겁니다." 나는 아무 말도 못 했다. 그건 신앙이 아니었다. 벼랑 끝에 선 사람이 허공에 대고 내미는, 텅 빈 손이었다. * 딸의 첫 번째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종양의 80%가 제거됐다. 병철은 그날 교회에서 두 시간을 울었다고 한다. 감사 기도를 드렸다고. 나는 그 말을 듣고, 신이 정말 영리하다고 생각했다. 80%를 고쳐줬다. 20%는 남겨뒀다. 완치를 주면 병철이 전화를 끊을 테니까. 20%의 불안이 그를 계속 새벽 네 시에 예배당으로 끌어내는 거다. 잔인하게 정확한 설계였다. 나는 그 생각을 굳이 입 밖에 내지 않았다. * 두 번째 수술은 여섯 달 뒤였다. 남은 20%가 다시 자랐다. 병원에서 연락이 온 날, 병철은 사무실에 있었다. 전화를 받는 그의 얼굴을 나는 건너편 자리에서 보고 있었다.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 그게 더 무서웠다. 놀라거나 무너지는 게 아니라, 이미 익숙하게 일어난 일상처럼 무덤덤했다. 그는 전화를 끊고 가방을 챙기더니 교회로 향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다 뜻이 있을 것이라고. 손의 반투명한 딱지가 형광등 아래서 번들거렸다. 나는 그날 처음으로, 신을 무서워했다. * 두 번째 수술 전날, 회사 동료가 병철의 딸 병문안을 갔다고 말했다. 모두가 그랬듯, 병철에게 돈을 빌려준 사람은 아니었지만 뭐 그럴 수도 있다고만 생각했다. 대화를 이어가다가 슬슬 대화 주제가 떨어질 때 즈음, 그는 목소리를 낮추며 은근슬쩍 말했다. "내가 병문안 갔을 때 병철이가 딸한테 이상한 말을 하더라고." "뭐라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이렇게 하시는 거야. 아프게 해서 우리를 만나러 오신 거야. 그러니까 감사해야 해."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일곱 살짜리한테?" "여덟 살이더라 이제." * 다행히 두 번째 수술도 잘 됐다. 종양이 다 제거됐다. 병철은 수술실 앞 복도에서 소식을 듣고 그 자리에서 쓰러졌단다. 예상하건데, 쓰러진 게 아니었을 것이다.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이었겠지. 병원 복도 한가운데서. 나는 그 장면을 동료에게 전해 들었다. 그리고 오래 생각했다. 공공장소에서 무릎을 꿇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얼마만큼의 것을 잃어야만 가능한 것인지. * 이쯤에서 나는 다시 신에 대해 생각해봤다. 신을 믿는 것과 믿지 않는 것 중에 무엇이 더 손해인가에 대해. 나는 수에 밝은 사람이다. 이런 것쯤은 쉽게 계산할 수 있었다. 모든 경우에 수지타산을 따져봤다. 결론은 하나의 답변만을 도출해냈다. 신이 존재하든, 안 하든. 이 세상의 신이 선하든, 악하든. 신을 믿는 것이 무조건 더 이득이었다. 그 다음날부터 나는 병철과 함께 교회에 갔다. * 병철은 같이 교회에 가자는 말에 오랜만에 미소를 보였다. 아니, 미소는 아니었다. 내 말에 자동적으로 일어난 생리학적 반사 작용에 더 가깝겠다. 부자연스럽게 올라간 입꼬리와 대비되게 드러내지 않은 이빨, 웃고 있음에도 솟지 않은 광대와 여전히 텅 빈 눈빛. 솔직하게 말하면 불쾌했다. 하지만 불쾌함의 대상은 병철이 아니었다. 교회에 도착하니 목사와 눈이 마주쳤고 그는 병철을 단상 위에 올렸다. 아주 기쁜 일이 있다고 말했다. 병철의 딸이 완치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우렁찬 박수가 나올 법도 했지만, 이상하게도 끝내 나오지 않았다. 병철은 눈물을 흘리며 준비했다는 듯이 기도문을 말했다. 목소리는 전혀 떨리지 않았다. "이 모든 일이 저를 도와준 동료들, 여기 계신 모든 분들, 존경하는 목사님, 그리고 역시나 저희 가족을 구원해주신 하느님 덕분입니다. 하느님 정말 감사합니다. 아멘." 병철과 사람들은 모두 동시에 기도를 했다. 나도 눈치껏 기도를 올렸지만 그 속에 녹아들지는 못했다. 기도를 시작하고 3초 뒤 모두는 외쳤다. "아멘." 나는 입을 열었다가 아무 말 없이 다시 닫았다. 솔직하게 말하면, 불쾌했다. * 나는 그날 밤 오래 앉아 있었다. 신이 병철을 만난 방식이 옳은 건지. 딸의 머릿속 종양이 그것을 위한 도구였다면, 그 신은 무엇인지. 나는 이제 그렇게 생각한다. 기적의 반대말은 재앙이 아니다. 기적의 반대말은 일상이다. 일상은 기적과는 너무나 멀고, 예상치 못한 불행으로 가득 차있다. 그 불행은 곧 전단지다. 신이 우리 문 앞에 밀어 넣는, 외면하기 힘든 방식으로 인쇄된 전단지. 그 전단지의 재료가 때로는 일곱 살짜리 아이의 머릿속이라는 것. 그것이 바로 일상이다. 딸이 완치 판정을 받은 뒤에도 병철은 새벽 네 시에 일어난다. 그 손의 딱지는 여전히 번들거리며 매마르게 갈라질 뿐이었다. * 나는 지금도 보험 설계사다. 요즘은 상담할 때 이런 말을 먼저 한다. "불행이 생기기 전에 오셨군요. 잘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 떠오르는 생각을, 나는 매번 억누른다. 신도 나와 같은 말을 한다는 생각. 나는 직업을 살려 최고의 보험을 들어놓은 상태다. 그것이 신앙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쩌면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신앙의 정확한 정의를 깨달은 것일지도. * 여기에서, 그대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다. 지금 그대의 일상은 평안한가? 더할 나위 없이 평안하다면, 그대만은 속지 말라. 그 때가 전단지를 보낼 최적의 시기다. 아주 일상적인 사건이 그대를 덮치기 직전이다. 그러니 몇 가지 당부하지. 가까운 교회에 가라. 식전 기도를 올려라. 십자가를 집에 두라. 성경을 읽어라. 이건 권유가 아니다. 협박이다. 아, 오해는 하지 말기를. 협박의 주체는 내가 아니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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